부활 후 첫 주일 - 제3의 길동무(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관리자
2022-04-24
조회수 696

제3의 길동무 / 눅 24:17-27

 

오랜 전, 프랑스 파리의 한 고급 아파트에서, 죽은 지 10개월이 지난 64세의 피숑이라는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피숑은 젊은 시절 유명한 패션모델이었으며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로도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젊음도 가고, 아름다움도 가고, 인기도 가고, 돈도 가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사람들이 기억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초라하고, 외로운 피숑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단식하여, 굶어 죽는 방법을 택하였고

“죽음의 일기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단식을 시작한 지

17일째 / 하루 반 리터의 물을 마신다. 심장이 기진맥진, 체중은 45킬로그램, 심장이 텅 빈 것 같다. 목숨이 이렇게 끈질긴가!

32일째 /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다. 스프 한 그릇을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더러운 세상의 유혹에 저주가 있으라.

36일째 / 소금통 속에 내장을 모두 토해낸 달팽이 같다. 그런데도 심장은 멎을 생각을 않고 있다.

39일째 / 죽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죽음을 죽고 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고독이다.

45일째 / 이제 몸을 까딱할 수가 없다. 허리가 아프다. 내 오줌은 온통 피다. 더 이상 일어 설 수 없다.

그리고 일기장은 멎었습니다.

 

피숑은, 죽음의 일기장에서

자살한 이유를 - “경제적인 어려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고독, 사는 것이 힘들어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숑의 죽음의 일기장을 통하여, 우리 인생을 생각해 봅니다.

⦁사는 것? - 힘들고 어렵습니다.

⦁죽는 것? - 무섭고 두렵습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연인이었던 보브아르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책에서

주인공 포스카는 불사약을 먹고 600년을 살게 됩니다.

100년도 못 사는 인생인데, 600년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다 죽었습니다.

함께 지낼 친구 친지들이 다 죽었습니다.

누구하고 지냅니까?

무엇하고 지냅니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인생이라! - 고독함과 싸우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없이 슬프게 살아갑니다.

 

 

야곱이 이집트의 파라오 임금 앞에서

“(창 47:9)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 산다는 것은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솔로몬이 기록한 전도서 2:23에서

“일평생은 근심과 수고와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

- 산다는 것은 수고와 슬픔입니다.

- 산다는 것에 쉼, 안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죽는 것은 어떻습니까?

중국의 팽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는데

팽조는, 800살을 살다가 죽어서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팽조가 죽었을 때에, 함께 살던 아내가 너무도 슬프게 울어

이웃이 팽조의 아내를 위로하면서

“인생 칠십 고래희 - 70을 사는 인생도 흔하지 않은데, 800의 수를 누렸으니, 얼마나 복된 삶이었습니까?”

팽조의 아내는 “800이 많기는 하지만, 900보다는 적지 않습니까?” 말하였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하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왕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때가 이르면!

다윗이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복자 로마 사람들을 몰아내시고,

무너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시고

로마의 비호 아래 권세를 누리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을 징벌하시고

찬란한 유대왕국을 세우실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렀다!”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로마인들을 몰아내기는커녕

로마인에게 넘겨지시고

로마인들이 가장 흉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형장 갈보리⦁골고다로 끌려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십니다.

아픔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크게 울부짖으시는데

십자가 밑에 있던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다.

엘리야 선지자가 내려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의 마지막 기대와 바램을 저버리시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시고, 차가운 돌무덤에 장사 되셨습니다.

 

 

16세기, 독일의 궁중 화가인 ‘한스 홀바인’이 “무덤 속의 그리스도”란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들의 모습에 크게 슬퍼하며 탄식하는 어머니도 없고

안타까워하는 제자도 없고

컴컴한 돌무덤에 - 갈비뼈가 드러난 앙상한 몸⦁검게 멍이 든 손과 발⦁감기지 않은 눈⦁벌어진 입 – 싸늘한 죽음입니다.

 

부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고,

허무주의나 무신론으로 이끌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본 ‘도스토옙스키’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런 그림을 보다가는 가지고 있던 믿음도 없어지겠어요.” - 소설 “백치”를 통하여 말합니다.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왕이라 믿었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무덤에 묻히실 때

⦁ 제자들의 꿈도 묻혔습니다.

⦁ 유대인들의 소망도 묻혔습니다.

⦁ 정복자 로마인들을 몰아낼 것이라는 희망은 절망이 되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기대는 낙심이 되고

찬란한 유대 왕국 건설에 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마 28:5-6)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데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처음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후손 된 모든 인생들은!

죄 가운데 잉태되어, 죄의 종으로 태어나,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롬 5:21)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느니라.”

(롬 6:16)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느니라.”

(롬 8:2)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살고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 차가운 돌무덤에 장사 되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의 권세⦁사단의 권세⦁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부활의 주님⦁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얽어매고 있던 죄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온 인류를 영원한 저주와 심판의 자리로 끌고 가던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온 인류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하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품은 사람은 누구든지

(눅 20:36) “너희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글로바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5킬로 쯤 떨어져 있는 엠마오 마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로 믿고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믿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차디찬 돌무덤에 장사되자

크게 낙심한 글로바는! 다른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큰 절망 가운데,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른 아침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엠마오에 거의 이르렀을 때에

해는 서산에 기울고, 서쪽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엠마오를 향하여 가는 두 제자의 마음처럼!

석양의 황혼 가운데, 곧 어둠이 찾아오려 합니다.

 

두 제자가 고향 엠마오를 향하여 힘없이 걸어갈 때에, 낯선 한 사람이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제3의 길동무가 생겼습니다.

길동무는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습니까?” 물었고

두 제자는 “요사이 예루살렘에 있었던 큰 소동을 알지 못합니까?” 하는 말로 시작하여

“몇 해 전,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오묘한 말씀을 들려주셨고,

크고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로 믿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구원자로 믿었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차디찬 돌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정복자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다윗 왕국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였던 기대와 소망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앉으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귀영화⦁권세를 누릴 것이라는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저희들은, 큰 절망과 낙심 가운데, 고향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함께 하는 제3의 길동무가

크게 낙심하여 걸어가고 있는 글로바와 제자에게

“왜 선지자의 말을 깨닫지 못합니까?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은 뒤에 영광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말하며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약속을⦁성경의 예언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글로바와 제자는!

길동무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날이 저물어, 어둠이 짙게 깔릴 때, 고향 엠마오에 이르렀습니다.

 

제3의 길동무는 더 가려 하기에

“날이 어두워졌고, 시장하실 테니, 이곳에 머물다가, 날이 밝으면 떠나시지요!”

강권하여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제3의 길동무가, 떡을 들어 기도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눈이 밝아졌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걸었던

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말해 주었던

절망한 마음을 뜨겁게 하였던

낙심한 마음에 새 희망과 기쁨을 주었던

제3의 길동무는,

다름 아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의 주님⦁생명의 주님⦁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결코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교우 여러분!

사는 것이 힘듭니까?

사는 것이 수고와 슬픔입니까?

 

내가 믿는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 죽으셨지만,

무덤에 누워 계신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예수님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예수님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 인생길에서 언제나 동행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쓰리랑카에는 캔디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습니다.

캔디시에는 불치사란 사찰이 있는데,

이 사찰 때문에 캔디시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불치사에는 “싼 함만”이라는 부처의 송곳 이빨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싼 함만”은, 하루에 딱 3번 일반에 공개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기 위하여, 미리 와서 기다렸다가, 부처의 이빨을 보고 갑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이빨을 소중히 여깁니다.

석가모니의 시신을 화장하고 나온 사리를 소중히 여깁니다.

석가모니의 이빨과 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사찰은 유명한 사찰이고, 많은 불자들이 방문합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화려하고 웅장한 무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있고

이슬람교도는 마호멧의 화려고 웅장한 무덤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여행 중에 찾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중국의 진시황릉, 북경의 명나라 13왕릉, 경주 고분 등은 죽은 자의 무덤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빨도 없고, 사리도 없고, 자랑할 무덤도 없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로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예수님이 묻히셨던 곳이라고, 많은 이들이 참배를 하고 있는데

가이드가 다른 곳으로 안내하며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저곳이 아니라 이곳입니다.” 말합니다.

예수님이 묻히신 곳이 “이곳입니까? 저곳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지만

예수님은 무덤에 묻혀 계시지 않고

사망 권세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의 무덤이 이곳인가? 저곳인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과 동행하고 계십니다.

 

⦁인생이 힘들다구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사는 것이 답답하다구요?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너무도 힘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구요?

예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생들이!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요 14: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도록 - “예수 그리스도의 영⦁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세상에 계시게 하셨고

예수님은 구름을 타시고 – 원래 거하시던 하나님의 나라⦁하늘나라⦁영광의 나라⦁영원한 나라⦁생명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가 영원토록 거할 처소⦁영원히 안식할 영광스러운 하늘의 궁전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친구 목사님의 말입니다.

70이 되신 장로님이!

건강이 예전 같지 않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공항장애가 왔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는 “교회가 너무 추워 교회를 못 나오시겠다.”고 하시고, 주일예배에 나오지 않으신답니다.

그러나, 병원에는 부지런히 다닙니다.

교회만 빼고, 가고 싶은 곳을 다 다닙니다.

친구 목사님은 이 장로님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는지?

아들을 내어 주신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답니다.

 

 

제가 아는,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시던 권사님이 계셨는데,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지내던 분인데,

“하나님께서 어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저 죽으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부활의 자녀는!

암 선고를 받으면,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통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만, 나의 떠날 시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나의 삶을 돌아보고

- 하나님께 지은 죄와 허물을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고

- 이웃에게 갚아야 하는 사랑의 빚을 모두 갚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히스기야 임금처럼,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생명을 연장 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살면 - 주의 일을 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죽으면 - 하나님께서 친히 예배하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니 감사하고

그래서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부활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예비하신 영광의 나라⦁생명의 나라⦁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맞아 주시고

주님을 사랑하여 흘린 눈물과 주님을 위하여 흘린 수고의 땀을 닦아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천국⦁영생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