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산교회의 창립

1900, 조선에 살다

1899년, 강원도 지역에 처음 들어간 이는 미국 남감리교 소속의 하디(R. A. Hardie) 선교사였습니다.

2년 동안 복음을 증거 하여 춘천에  스무개 마을에 백명이 넘는 신자가 생겼습니다.

1901년 4월에 후임으로 무스(J. R. Moose)선교사가 부임하였습니다.

무스 선교사가 지은 "1900 조선에 살다" 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교회소개

무스 선교사님께서는 전도자 이득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전도를 다녔습니다. 무스 선교사님께서는 마포나루에서 황포돗대에 자전거를 싣고,양수리를 지나 북한강의 금남리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금남리는 별장지, 유흥가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는 마을이었습니다.  논이 없고 밭만 있었기 때문에 딸이 보리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금남리에서 자전거와 도보로 2~3킬로를 오면 답내리 월산리 마을이 나오는데 답내리란 이름 대로 논이 많아서 풍요로운 마을이었습니다.

무스 선교사님께서 쉬어갈 만한 사랑채가 있는 집의 대문에 서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연 주인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주인장께서는 벽안의 나그네에게 기꺼이 사랑채를 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월산리 답내리 마을이 하나님의 복음과의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벽안의 나그네를 기꺼이 영접한 이인하씨는 후에 세례를 받고 영수가 되셨습니다. 이인하씨의 손주가 본 교회 이용주 장로, 이범주 집사, 이지주 권사이시고 증손이 이용상 장로, 이용환 집사 이시고 5대가 이상연 이수연 이지유입니다.

1901년 무스 선교사님에 의하여 월산리 답내리 마을에 달뫼(보통 사람들은 달뫼를 당미라고 발음하였습니다)교회가 세워졌습니다.지금의 답내 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은 붉은 진흙 언덕이었기에, 사람들이 붉은 언덕이라고 불렀으며 이 씨네 땅이었습니다. 이 씨네서 기꺼이 땅을 내어 주어 이곳에 한옥으로 교회당에 세워졌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 월산교회와 삼일운동

교회소개

가평 달전리 처가댁으로 가는 김필규라는 학식이 높은 황해도 선비가 교회당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쳐 주기를 강청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배인학당이 세워졌고, 배인학당에서는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습니다. 배인학당은 6.25사변 후에 배정학교가 되고,배정학교는 후에 공립 화광중학교가 되었습니다. 화광중학교 연역에 1907년 화광중학교의 모태인 배인학당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산교회는 이 기록을 근거로 1907년을 교회 창립년도를 잡았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이인하 영수 댁에 머물렀다면 교회 창립년도가 1899년이고무스 선교사가 머물렀다면 교회 창립년도가 1901년일 것입니다.

1919년인 기미년 3월 1일 일제의 억압에 항거하여 독립선언서가 파고다공원에서 낭독되었고, 온 나라로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를 통하여 만세운동을 알게 된 교회에서는 마을 유지들과 의논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태극기를 만들며 시위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경에 적발되어 몇 사람이 연행되어 갔습니다. 그날 밤인 3월 16일, 교인들과 주민 200여명은 횃불을 들고 모란고개를 넘어 마석 병참 앞에 가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당황한 일경의 발포로 5분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7분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만세를 부른 다음날 일본 경찰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사람을 검거하기 위하여 모란고개를 넘어왔습니다.  이를 안 남자들은 먼 친척집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래서 기미년에는 남자들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훈장증

삼일운동3

교회 지도자였던 김필규 선생님은 미처 피하지 못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를 하셨습니다. 1995년 김필규 선생님에게 국민훈장 광복장이 추서되었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셨습니다.

월산교회가 중심이었던 월산리 답내리 주민 200여명에 의하여 일어난 만세운동은 한강 이북 지역에 있었던 가장 처참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1989년부터 교회와 남양주 문화원의 공동 주관으로 삼일절 기념예배를 드려오고 있습니다. 1993년 도에는 남양주시와 교우들의 성금으로 삼일절 기념비를 세웠고, 2000년도부터는 횃불행진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 월산교회와 6.25

배정학교 졸업식 사진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교회당이 불에 타게 됩니다. 지현리 공회당을 임시 예배 처소로 정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1951년 미 77탱크부대에서 일본 사람의 소유였던 적산 땅에 교회당과 학교를 건축하여 주었습니다. 배정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중위로 근무하던 레이턴이란 분이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저희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정학교를 운영하였지만 재정적으로 운영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교회는 고심 끝에 학교를 문교부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공립 화광중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미 77탱크 부대에서 중위로 근무하였던 레이톤씨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의 사진(앞줄 왼쪽에서 2번째) / 레이턴씨가 보내온 월산리 답내리 주민의 사진입니다.
>> 월산교회의 월산리 시대

학교를 문교부에 기증하고 나니 학교 마당에 교회당이 서 있었습니다. 

교회당을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4년에 지금의 화도 휴게소 윗 편에 400여 평을 구입하여 교회당을 지어 이전하였습니다.  


1985년에 장로를 세움으로 조직교회가 되고 자립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여 주일에 교우들끼리 예배를 드린 적도 많았습니다.


1988년 4월 월산리 교회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 예배 때에 김풍호 목사님께서 32살의 나이에 부임하셨습니다.  


>> 월산교회의 답내리 시대



1988년 교회당을 화도휴게소에 매각하고, 800여 평을 사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농지라 교회 건축을 할 수 없어, 양토장 허가를 얻어 건축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당이라 하기에는 창고와 같아서 교회당 앞부분만 리모델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쁜 교회당으로 목회와 신학(두란노서원)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2003년, 월산교회 100주년 기념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월산교회 100주년을 맞이하며  “함께 하신 100년 인도하실 1000년”이란 표어를 정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울렸던 교회종을 일제가 떼어갔고, 해방 후 다시 종을 구입하여 울렸습니다.

100주년 기념교회당을 건축하고 십자가 탑에 달아 두었습니다.

2019년에 월산교회 창립 120주년 사업으로 종탑을 세우고 종을 달고 매 주일 예배시간 10분 전에 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고 온 교우들이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지난 온 100년 보다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고 있습니다.